교통사고나 산업재해 등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었을 때, 피해자 입장에서는 “내가 입은 손해액 100%를 당연히 배상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법원의 판결에서는 가해자의 책임이 일정 비율로 제한되어 배상액이 감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대법원 판례를 바탕으로 손해배상 소송에서 배상액을 결정짓는 핵심 원리인 ‘과실상계‘와 ‘책임제한’ 법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손해배상 책임제한의 대원칙: 손해의 공평 부담
손해배상책임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에 대한 법리는 그 동안 여러 대법원 판례를 통해 정립되어 왔습니다. 최근 대법원 판례 중 하나를 살펴보면, 손해배상 책임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대법원 2022. 11. 30. 선고 2016다26662, 2016다26679(병합), 2016다26686(병합) 판결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관하여 과실이 있거나 가해자의 책임을 제한할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배상책임의 범위를 정함에 있어서 당연히 이를 참작하여야 하고, 나아가 그 책임제한의 비율을 정할 때에는 손해의 공평 부담이라는 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손해 발생과 관련된 모든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며, 책임제한에 관한 사실인정이나 비율을 정하는 것이 사실심의 전권사항이라고 하더라도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하여서는 안 된다.
즉, 민사상 손해배상의 근본 목적은 가해자를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손해를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얼마나 공평하게 나눌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습니다. 피해자에게도 사고 발생이나 손해 확대에 원인을 제공한 과실이 있다면, 그 비율만큼 배상액에서 공제하는 것이 공평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뜻입니다.

2. 가해자의 과실 vs 피해자의 과실
대법원에서 말하는 가해자의 과실과 피해자의 과실은 그 의미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2. 피해자의 과실 : 약한 의미의 부주의
대법원 1997. 12. 9. 선고 97다43086 판결
불법행위에 있어서 피해자의 과실을 따지는 과실상계에서의 과실은 가해자의 과실과 달리 사회통념이나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공동생활에 있어 요구되는 약한 의미의 부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위 판례의 대상이 된 교통사고의 피해자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보행자였습니다. 폭 21m의 편도 3차로의 도로에 설치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량에 치여 사망한 사고로, 21:50경 가로등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깜깜한 밤에 발생하였습니다.
횡단보도, 특히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오가는 차량을 잘 살피고 건너야 한다는 것은 사회통념 상 일반 상식에 가깝습니다. 횡단보도 사고임에도 구체적인 사고 경위에 따라 보행자에게 일부 과실이 인정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보행자의 ‘부주의’가 인정되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대법원은 “위 망인에게도 횡단보도를 횡단함에 있어 차량이 오는 쪽의 안전을 소홀히 한 채 횡단보도를 건너간 부주의가 있었다”고 보았고, 주변이 매우 어두운 밤에 차량을 살피지 않은 ‘부주의’를 피해자의 과실로 참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피해자의 ‘부주의’로 인한 과실은 얼마 정도로 볼 수 있을까요? 이는 구체적인 사고 경위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관련 하급심 판례 중 일부를 살펴보겠습니다.

횡단보도 보행자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도중, 보행자 신호가 적색신호로 변경된 후 차량에 충격당한 사고에서 피해자의 과실이 30% 정도 잡힌 사례가 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7. 10. 25. 선고 2016가단5103517 판결
망인이 보행자 녹색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하기는 하였으나 건너던 도중에 보행자 신호가 적색으로 바뀐 사실, 이렇게 신호가 바뀌고 약 5초가 지날 때까지도 망인이 위 횡단보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술에 취하여 천천히 횡단하다가 피고 차량에 충격당하여 이 사건 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바, 이 경우 망인에게도 신속하게 횡단보도를 벗어나든가 횡단을 중단하고 되돌아 가는 등으로 사고를 회피하여야 함 의무가 있다 할 것인데 이를 게을리 한 부주의가 인정되는바, … 피고의 책임을 손해의 70%로 제한한다(원고의 책임 30%).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발생한 사고에서는 자전거 운전자에게도 일부 과실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2020. 9. 24. 선고 2019가합53321 판결
자전거를 타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횡단 하였던 점 등 원고에게도 이 사건 사고와 관련한 부주의가 있었다고 보이고, 이러한 원고의 부주의는 이 사건 사고의 발생 및 손해의 확대에 기여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손해배상의 액수를 정함에 있어 원고의 과실을 20% 참작하기로 하여 피고의 책임을 80%로 제한한다.
신호기가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의 과실이 잡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남부지방법원 2019. 9. 4. 선고 2017가단250008 판결
원고로서도 야간에 신호기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었으면 좌우를 잘 살펴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였어야 함에도 이를 게올리한 것으로 보이는바, 이와 같은 원고의 부주의는 … 피고의 책임을 85%로 제한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 6. 9. 선고 2019가단5283339 판결
원고도 손수레를 끌면서 천천히 제천역 방면에서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쪽으로 사선으로 걸어 와 도로를 횡단하면서 진행차량의 동태를 잘 살피지 아니한 부주의가 있고, … 피고의 책임을 90%로 제한함이 상당하다.

2. 가해자의 과실 : 사회적 의무 위반의 강력한 과실
교통사고 가해자에게는 민법 제750조에 따른 불법행위책임과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제3조에 따른 운행자책임이 적용됩니다.
교통사고 손해배상사건에서 민법에 우선하여 적용되는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제3조에 따르면, 가해차량 운전자가 운행자로서 책임을 면하려면 가) 사고 당시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나) 피해자 또는 제3자에게 고의・과실이 있으며, 다) 자동차의 구조상 결함 또는 기능상 장해가 없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하고,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가해차량 운전자는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신속한 구제를 목적으로 가해자에게 거의 무과실책임에 준하는 무거운 책임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대법원 2005. 12. 8. 선고 2005다46479(본소),2005다46486(반소) 판결
자기 차의 승객이 아닌 보행자나 다른 차의 승객이 사상된 경우에는 운행자 및 운전자에게 주의의무의 해태 없이 피해자나 제3자에게 고의·과실이 있고 또한 운행 자동차의 구조결함이나 기능장해가 없었음을 입증한 때에는 자동차사고로 인한 인명의 사상에 손해배상의 책임이 없다는 취지를 규정하고 있는바, 위 면책사유에 대한 입증책임은 자기를 위하여 자동차를 운행하는 자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운행자가 위 면책사유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교통사고를 유발한 책임이 있는 자에게 보다 엄격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3. 가해자의 강력한 과실과 피해자의 부주의를 고려한 책임의 분담
책임제한의 비율(과실비율)을 정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판을 담당하는 사실심(1심, 2심) 판사의 고유 권한입니다. 하지만 대법원이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하여서는 안 된다”고 엄격한 통제 기준을 두고 있는 만큼, 판사 마음대로 아무 비율이나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따라 법원에서는 피해자의 부주의한 행동을 고려하여 가해자의 과실을 일정 부분 감경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안전벨트나 안전모 미착용, 전방주시 태만, 주위를 살피지 않고 횡단, 손해의 확대에 기여, 부주의한 호의동승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법원에서 피해자의 부주의로 자주 참작하는 사례 대표적인 사례들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관련 글 : 대법원 ‘공제 후 과실상계’ 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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